용서는 상대를 위한 일이 아니다: 원망에 낭비하던 에너지를 내 삶의 성공으로 돌리는 법
“용서해.”
살면서 한 번쯤은 이런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네가 용서해야 네가 이기는 거야.”
“너그러운 태도로 살면 언젠가 반드시 복이 온단다.”
“그냥 내려놔, 네가 져 줘, 그래야 네가 편해.”
좋은 말처럼 들립니다. 그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용서하지 못하면 자신이 너무 속 좁은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그렇게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그래, 이제 용서하자”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그 사람을 떠올리면 다시 화가 납니다. 죄책감까지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기도 하죠.
시간이 지나고 나서 웃음이 나올 때도 있지만, 당시 감정으로는 심하면 이불킥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을 마음속으로 다시 하고,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생각하다 보면 억울함이 다시 올라옵니다.
그렇게 원망은 마음 한구석에 마치 오래된 디젤엔진의 슬러지처럼 남습니다.
용서를 억지로 받아들이면 마음은 따라올까
여기서 한번 질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정말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걸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용서는 때때로 너무 결과 중심입니다.
“이제 잊어버려.” “좋게 생각해.” “네 마음을 위해 용서해.”
그 말을 듣고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정까지 동시에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용서를 조금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서의 출발점을 상대에게 두지 않는 것입니다.
원망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쓰는 일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을 싫어하는 감정 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다릅니다.
그 사람을 떠올리고, 당시 상황을 다시 생각하고, 내가 하지 못했던 말을 되뇌고, “왜 그랬을까?”를 반복해서 묻습니다.
그때마다 내 시간과 집중력과 감정이 그 사람에게 향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에너지는 신비한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동안 내가 어디에 생각을 쓰고, 무엇에 시간을 쓰고, 무엇에 감정을 쏟고, 무엇을 계속 신경 쓰는지를 뜻합니다.
원망하는 사람은 내 앞에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하루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원망의 문제는 단순히 “마음을 좋게 먹어야 한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 삶에서 무엇을 계속 점유하고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원망을 없애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현실적인 방법
원망을 없애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현실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원망에 쓰던 에너지를 다른 곳에 쓰는 것입니다.
운동을 해도 됩니다.
일을 해도 됩니다.
돈을 벌어도 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도 됩니다.
공부를 해도 됩니다.
내가 원하는 삶을 만드는 데 시간을 써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잊어버리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에게 계속 향하던 나의 관심을 내 삶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방향이 바뀌기 시작하면 원망을 없애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 사람에게 쓰던 생각의 시간이 조금씩 줄어듭니다.
나폴레온 힐이 말한 ‘에너지의 전환’
이런 관점은 나폴레온 힐이 말한 ‘전환(transmutation)’이라는 개념과도 연결해볼 수 있습니다.
힐은 《생각하라, 그리고 부자가 되어라/Think and Grow Rich》에서 강한 욕구와 감정에 담긴 추진력을 다른 형태의 창조적 활동으로 돌리는 개념을 설명했습니다. 그는 특히 성적 욕구를 창의성, 의지, 끈기와 같은 다른 활동으로 전환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힐의 모든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져올 수 있는 핵심은 훨씬 단순합니다.
강한 감정은 사람을 붙잡아두는 힘으로도 쓰일 수 있고, 다른 행동을 움직이는 추진력으로도 쓰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생겼다면 그 감정을 억지로 없애려고만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삶을 만드는 행동으로 방향을 돌려볼 수 있습니다.
그때부터 용서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진짜 용서는 상대에게 에너지를 더 주지 않는 것
상대에게 아무 감정도 느끼지 않아야 용서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용서는 너무 어려운 과제가 됩니다.
그 사람을 떠올렸을 때 아직 화가 날 수도 있습니다.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일이 잘못됐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감정이 남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 삶까지 계속 그 사건에 묶어둘 필요는 없습니다.
용서는 기억을 지우는 일이 아니라, 그 기억이 앞으로 내 삶에서 차지할 몫을 줄이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장 먼저 되찾아야 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내가 어디에 시간과 생각과 힘을 쓸 것인지 선택할 수 있다는 감각입니다.
그 감각을 되찾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조금 달라집니다.
원망의 대상이 내 삶의 중심에 계속 남아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용서란 상대를 위해 좋은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라,
내 삶의 시간과 관심과 에너지를 다시 내 쪽으로 가져오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더 질문이 생깁니다.
내게 그런 원망이 생긴 그 상황을, 나는 앞으로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용서는 단순히 누군가를 용서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의 주도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라는 더 근본적인 문제와 만나게 됩니다.
다음 편에서는 빅터 프랭클, 스티븐 코비, 롤로 메이의 가르침을 통해 이 질문을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시대도 분야도 달랐던 세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하나의 공통점, 이미 일어난 일과 그 이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는 관점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어쩌면 진짜 용서는 그 사람을 이해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에게 빼앗겼다고 느꼈던 내 삶의 방향을 다시 내가 선택하는 데서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