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26의 게시물 표시

나를 힘들게 한 사람들을 원망만 하던 내가, 내면의 자유를 위해 결국 바꾼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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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세상은 불공평하고 악해.' '착각하지 마라, 정신 차려!' 이 말은 지금의 누군가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한때 모든 원인을 밖에서 찾았던 과거의 나에게 하는 말 이다. 사회 초년생 시절 나는 꽤 좋은 조건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첫 직장은 외국계 기업이었다. 헤드헌터의 추천을 받아 입사했고, 면접 과정에서도 팀장의 선택을 받았다. 입사 전부터 나를 바라보는 기대가 있다는 것도 느꼈다. 막상 들어간 팀에는 내가 예상했던 체계가 없었다. 새로 만들어진 조직이라 업무 매뉴얼도 부족했고, 제대로 된 인수인계도 없었다. 협력사와의 관계 역시 정리되어 있지 않은 채 팀은 오히려 그들에게 의존하며 위치가 바뀐 관계로 보였었다. 나는 준비된 조직에서 실력을 보여줄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현실은 처음부터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하는 곳이었다. 왜 억울했을까, 알고보면 피해의식이 낳은 '착각' 옆 파트에서는 선임이 후임을 붙잡고 업무를 하나씩 알려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같은 생각이 반복됐다. 왜 나는 이런 곳에 배치됐을까. 왜 나는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을까. 왜 나만 알아서 해야 할까. 처음에는 합리적인 불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불만이 쌓이면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계속 증명하고 싶어졌다. 시스템이 잘못됐다는 증거를 찾고, 선배들의 태도를 비난하고, 협력사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내가 얼마나 불합리한 환경에 놓여 있는지 설명할수록 오히려 내 마음은 더 편해졌다. 적어도 내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다. 억울함을 계속 붙잡고 있으면 어느 순간부터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보다 피해자라는 역할을 지키는 사람 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내 태도는 결국 주변에도 전달됐다. 처음에는 나에게 기대가 컸던 팀장과 동료들과의 거리도 생겼다. 나는 그것마저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나는 왜 좋은 것도 쉽게 받지 못할까? 웨인 다이어에게서 찾은 ‘내가 기회를 놓쳐온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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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사양하는 것이 예의’라는 기준은 때로는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생활에서는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요? 생각을 바꾸겠다고 마음먹는 것만으로는 오래된 습관이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호의를 건네는 순간, 평소처럼 “아니에요”라는 말이 먼저 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웨인 다이어 의 가르침을 연결해볼 수 있습니다. 내가 나를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행동을 바꾼다 웨인 다이어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자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이 삶의 선택에 영향을 준다는 관점을 꾸준히 이야기했습니다. 이 가르침을 이번 이야기와 연결해보면 아주 현실적인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나는 과연 좋은 것을 받아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좋은 것’은 거창한 성공이나 물질적인 풍요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도움, 배려, 선물, 관심, 따뜻한 말처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오가는 호의도 포함됩니다. 만약 마음속에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기준이 너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면, 누군가 나에게 좋은 것을 건네는 순간에도 그것을 편안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행동 하나를 바꾸기 전에 받는 나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받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부터 시작합니다 이것을 거창한 자기암시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을 때 속으로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나도 받을 수 있다.” “내가 받는다고 해서 상대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존중해서 받을 수도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호의를 받는 행위의 의미가 조금 달라집니다. 내가 상대에게 신세를 지는게 아니라, 상대가 표현하고 싶었던 마음을 받아주는 것이 될 수 있...

호의를 거절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일까? 내가 풍요를 받아들이는 법을 다시 생각하게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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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밥을 사주겠다고 하면 “아니에요, 제가 살게요.” 선물을 받으면 “이런 걸 왜 사주세요?” 누군가 도움을 주려고 하면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 혹시 주변에 이런 사람이 있지 않나요? 겉으로 보면 참 겸손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이것이 언제나 겸손일까?" 누군가 내게 시간과 돈과 수고를 기꺼이 내어주고 있는데,  그것을 계속 사양하거나 다시 돌려주려고 하는 행동은 상대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까요? 오히려 상대가 베풀고 싶었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행동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호의를 받는 것도 하나의 능력일 수 있다 나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베푸는 것만 풍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호의를 감사히 받아들이는 것 역시 풍요를 받아들이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덕분에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덕분에 편하게 해결했어요.” 이렇게 말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다음에 내가 좋은 것을 나누면 됩니다. “다음에 내려올 때 저희가 맛있는 것 가지고 올게요.” 이것은 상대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받은 것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다시 흘려보내는 방식 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게도 오래 남아 있는 한 장면이 있다 어릴 때 시골 친척집에 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내가 오랜만에 친척들을 만나 너무 반가웠고, 삼겹살이 먹고 싶다고 말했던 날이었습니다. 친척들은 바로 읍내 시장에 가서 삼겹살을 사왔습니다. 집에서 함께 고기를 구워 먹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친척들과 함께하며 참 맛있고 행복했던 기억입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아버지의 음식을 대하는 태도 하나 때문에 그 즐거운 자리가 무거워졌습니다. 먹으려고 하면 “그러는 거 아니야”라며 손을 치우고, “사양이 미덕이야!”라고 말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때의 나는 그 상황 자체가 참 답답했습니다....

어제 새벽 2시, 수년 만에 술이 생각났다 (당신의 번아웃이 보내는 마지막 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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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 주말을 앞둔 금요일 새벽 2시였습니다. 며칠째 이어지던 기획서 작성을 끝내고 드디어 노트북을 덮는 순간, 예상치 못한 공허한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드디어 끝냈다'는 성취감이나 시원함 대신, 가슴속 깊은 곳에서 거대한 허무함과 이유 모를 불안이 솟구쳤기 때문입니다. 그날 밤은 쉽게 잠에 들지 못했습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데, '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렇게까지 나를 쥐어짜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주말 내내 침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방전된 배터리처럼 누워만 있었습니다. 월요일 아침이 다가오는 것이 공포스럽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바로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내 마음의 엔진이 마침내 과열되어 타버렸다는 사실을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던 이유는 인정받고 싶어서였습니다. 하지만 그 인정의 대가는 나 자신의 완벽한 소진이었습니다." 1. 성실함이라는 함정, 완벽주의가 만든 방전 돌이켜보면 저는 늘 '잘해내고 싶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일찍 출근하고, 퇴근 후에도 일과 관련된 자기계발 서적을 읽으며, 주말에도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이 '성실한 삶'이라고 믿었습니다. 남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모든 프로젝트에서 완벽한 결과를 내야만 내 가치가 증명된다고 생각했습니다. [IMAGE 2: 지친 표정으로 불 켜진 밤길을 혼자 걸어가는 모습] 하지만 심리학자들이 말하듯 번아웃은 '일이 많아서'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수많은 기대와 성과 지표에 나를 맞추려 할 때, 그리고 스스로를 칭찬하기보다 채찍질하는 시간이 길어질 때 찾아옵니다. 내 삶의 주도권이 내가 아닌 '타인의 평가'와 '끝없는 과제'로 넘어간 순간부터 마음은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계적인 심리학자 브레네 브라운(Brené Brown) 역시 완벽주의가 ...

내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하는가: 내 언어가 현실세계에 투영하는 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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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는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운이 없다.” “사람들은 결국 나를 실망시킨다.” 이런 말들이 단순한 생각처럼 보이지만, 반복되면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바라보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면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을까? 저에게 이 질문은 단순한 자기계발 문장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저를 돌아보게 만들었고, 제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원망과 결핍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웠는지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말보다 더 깊은 곳에는 자아에 대한 정의가 있다 우리는 자신을 설명할 때 여러 가지 문장을 사용합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나는 사람을 잘 믿지 못해.” “나는 사업에는 소질이 없어.” “나는 관계에서 늘 상처받는 쪽이야.” “나는 돈과는 인연이 없는 것 같아.” 이런 말들은 단순한 자기소개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그 문장 안에는 내가 나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는지가 들어 있습니다. 한 번 그렇게 정의한 자신을 계속 바라보면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도 그것을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밀어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나는 배우는 사람이다”, “나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나는 내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같은 상황에서도 질문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차이가 꽤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삶을 바꾸려고 애쓰기 전에,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지를 먼저 볼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네빌 고다드가 제게 남긴 질문 이 지점에서 제가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이 네빌 고다드 입니다. 네빌 고다드의 가르침에서 제가 특히 관심 있게 바라본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보다 자신을 어떤 존재로 정의하는가 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라고 믿는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내가 나에게 반복하는 말이 결국 나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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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말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도 있지만, 그보다 훨씬 자주 반복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입니다. “나는 왜 이럴까.” “사람들은 믿을 수 없어.” “나는 늘 손해 보는 것 같아.” “나는 아직 부족해.” 이런 말들은 그 순간에는 그냥 지나가는 생각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같은 말을 반복하다 보면 조금 다른 일이 생깁니다. 그 문장이 어느 순간부터 내가 세상과 나 자신을 바라보는 하나의 방식이 되기도 합니다. 한때 나는 내 안에서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저 역시 예전에는 원망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스스로 보기에도 불편할 정도였습니다. 관계에서 기대했던 만큼 마음을 돌려받지 못하면 서운했고, 내가 상대에게 잘해준 만큼 상대도 나를 이해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으면 생각은 쉽게 이런 방향으로 흘렀습니다. “나는 이렇게까지 하는데 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을까.” “세상은 역시 냉정하다.” “내가 착해서 손해를 보는 것 같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의 저는 상처받은 기억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 상처를 해석하는 문장까지 반복해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문장들은 계속 같은 감정을 불러왔습니다. 원망하고, 억울해하고, 과거를 다시 생각하고, 상대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머릿속에서 계속 따졌습니다. 누군가가 제 앞에 없어도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은 계속 제 안에서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상당한 정서적 낭비였습니다. 말은 감정을 다시 불러오는 스위치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 제가 말하는 정서적 염증 은 의학적인 염증을 뜻하지 않습니다. 분노, 원망, 자기비난, 결핍감처럼 마음을 반복해서 자극하는 감정이 오래 지속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상처 자체는 이미 지나갔는데도 내가 그 상처를 설명하는 말을 계속 반복하면 감정은 다시 살아납니다. “나는 피해를 봤다.” “...

용서 이후, 내 삶의 주도권은 누가 가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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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에서는 원망에 계속 쓰이고 있던 시간과 생각과 감정을 어떻게 다시 내 삶으로 가져올 수 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용서를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그 사람에게 향하던 나의 관심을 내 삶으로 돌리는 것에서 새로운 출발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런 질문을 남겼습니다. 내게 그런 원망이 생긴 그 상황을, 나는 앞으로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용서는 단순히 누군가를 용서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의 주도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 라는 문제와 만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빅터 프랭클, 스티븐 코비, 롤로 메이의 생각을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시대와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인간이 주어진 조건 속에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흥미로운 접점을 보여줍니다. 빅터 프랭클: 이미 일어난 일과 그 이후의 선택 빅터 프랭클의 의미치료에서는 인간이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 주어진 상황에 어떤 태도로 응답할 것인가 라는 질문이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삶에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건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행동 때문에 상처를 받는 일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는 사실까지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구분해서 볼 수 있습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와, 그 일이 일어난 이후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과거의 사건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했던 행동을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건 이후의 내 삶까지 과거에 맡겨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선택의 여지가 생깁니다. 스티븐 코비: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곳에 집중하기 스티븐 코비가 말한 영향력의 범위(Circle of Influence) 도 이 문제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수많은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직접 바꿀 수 있는 것은 ...

용서는 상대를 위한 일이 아니다: 원망에 낭비하던 에너지를 내 삶의 성공으로 돌리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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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해.” 살면서 한 번쯤은 이런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네가 용서해야 네가 이기는 거야.” “너그러운 태도로 살면 언젠가 반드시 복이 온단다.” “그냥 내려놔, 네가 져 줘, 그래야 네가 편해.” 좋은 말처럼 들립니다. 그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고, 용서하지 못하면 자신이 너무 속 좁은 사람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그렇게 쉽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그래, 이제 용서하자”고 생각하면서도 어느 순간 그 사람을 떠올리면 다시 화가 납니다. 죄책감까지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되기도 하죠. 시간이 지나고 나서 웃음이 나올 때도 있지만, 당시 감정으로는 심하면 이불킥이 나올 정도 입니다. 그때 하지 못했던 말을 마음속으로 다시 하고,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생각하다 보면 억울함이 다시 올라옵니다. 그렇게 원망은 마음 한구석에 마치 오래된 디젤엔진의 슬러지처럼 남습니다. 용서를 억지로 받아들이면 마음은 따라올까 여기서 한번 질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정말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걸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용서는 때때로 너무 결과 중심입니다. “이제 잊어버려.” “좋게 생각해.” “네 마음을 위해 용서해.” 그 말을 듣고 머리로는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정까지 동시에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용서를 조금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용서의 출발점을 상대에게 두지 않는 것입니다. 원망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쓰는 일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사람을 싫어하는 감정 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다릅니다. 그 사람을 떠올리고, 당시 상황을 다시 생각하고, 내가 하지 못했던 말을 되뇌고, “왜 그랬을까?”를 반복해서 묻습니다. 그때마다 내 시간과 집중력과 감정이 그 사람에게 향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에너지 는 신비한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