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이후, 내 삶의 주도권은 누가 가지고 있는가
지난 편에서는 원망에 계속 쓰이고 있던 시간과 생각과 감정을 어떻게 다시 내 삶으로 가져올 수 있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용서를 억지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그 사람에게 향하던 나의 관심을 내 삶으로 돌리는 것에서 새로운 출발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런 질문을 남겼습니다.
내게 그런 원망이 생긴 그 상황을, 나는 앞으로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이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용서는 단순히 누군가를 용서하는 문제가 아니라, 내 삶의 주도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라는 문제와 만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빅터 프랭클, 스티븐 코비, 롤로 메이의 생각을 함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시대와 분야에서 활동했지만, 인간이 주어진 조건 속에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흥미로운 접점을 보여줍니다.
빅터 프랭클: 이미 일어난 일과 그 이후의 선택
빅터 프랭클의 의미치료에서는 인간이 모든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보다, 주어진 상황에 어떤 태도로 응답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삶에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사건이 있습니다.
누군가의 행동 때문에 상처를 받는 일도 그중 하나입니다.
그 일이 내게 일어났다는 사실까지 내가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구분해서 볼 수 있습니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와, 그 일이 일어난 이후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는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과거의 사건을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 사람이 했던 행동을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건 이후의 내 삶까지 과거에 맡겨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선택의 여지가 생깁니다.
스티븐 코비: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곳에 집중하기
스티븐 코비가 말한 영향력의 범위(Circle of Influence)도 이 문제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됩니다.
우리는 수많은 일에 관심을 가질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직접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가 후회할지.
사과할지.
언젠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지.
이미 지나간 사건이 달라질지.
이런 것들은 내 손에 있지 않습니다.
반면 지금 내가 무엇을 할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배우고, 어떤 일을 하고, 누구와 관계를 맺고, 내 시간을 어디에 사용할지는 현재의 내 영역에 있습니다.
상대를 바꾸는 데 계속 에너지를 쓸 것인가,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삶에 에너지를 쓸 것인가.
질문이 이렇게 바뀌는 순간 시선도 달라집니다.
상대를 바라보던 시선이 다시 나에게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롤로 메이: 주어진 조건 속에서도 선택할 수 있는 인간
실존주의 심리학자 롤로 메이 역시 자유와 선택, 책임을 중요한 주제로 다뤘습니다.
그가 말하는 자유를 모든 조건을 마음대로 바꾸는 힘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주어진 조건 속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와 연결해서 볼 수 있습니다.
상처를 받은 사실은 내가 선택한 일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때 느꼈던 분노 역시 자연스러운 감정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경험 이후의 모든 선택까지 그 사건이 결정하도록 둘 필요는 없습니다.
오늘 무엇을 할지, 어떤 방향으로 살아갈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길지는 여전히 현재의 나에게 남아 있습니다.
내가 바꿀 수 없는 조건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구분하는 것.
이것이 삶의 주도권을 되찾는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세 사람의 생각이 만나는 곳
프랭클은 주어진 상황 속에서 선택할 수 있는 태도를 이야기합니다.
코비는 내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에 집중하도록 시선을 돌립니다.
메이는 주어진 조건 속에서도 선택할 수 있는 인간의 가능성을 바라봅니다.
표현은 서로 다르지만,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용서라는 주제에서는 하나의 방향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이 내 삶에 일어날 수는 있지만, 그 일이 일어난 이후의 모든 선택까지 그 사건이 결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용서에 대한 질문도 달라집니다.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에서
“그 일이 지나간 지금, 나는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가?”
로 이동합니다.
책임과 잘못은 같은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구분이 하나 있습니다.
내 삶에 대한 책임을 다시 가져오는 것과, 내가 당한 일의 잘못을 떠안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누군가가 나에게 상처를 줬다면 그 행동에 대한 책임은 그 사람에게 있습니다.
부당한 일을 당했다면 부당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화가 났다면 화가 났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상처를 아름답게 포장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건 이후의 삶에는 또 다른 선택의 영역이 생깁니다.
그 사람이 한 일은 그 사람의 몫입니다.
그 일이 지나간 이후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갈지는 이제 내 몫입니다.
책임을 되찾는다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을 다시 내 것으로 가져오는 것입니다.
삶의 주도권은 모든 것을 통제하는 힘이 아니다
삶의 주도권을 가진다는 것은 모든 일이 내 뜻대로 흘러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과거는 바꿀 수 없습니다.
타인의 마음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현재의 나에게 남아 있는 선택은 있습니다.
내 시간을 어디에 사용할지.
무엇을 배울지.
어떤 관계를 선택할지.
어떤 능력을 키울지.
어떤 방향으로 살아갈지.
그리고 내 삶에 얼마나 많은 공간을 과거의 한 사람에게 계속 내어줄지.
삶의 주도권은 모든 것을 통제하는 능력이 아니라,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을 놓치지 않는 능력에 가깝습니다.
결국 용서는 ‘놓아주는 것’보다 ‘되찾는 것’에 가깝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나는 정말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걸까요?”
어쩌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이제 내 삶에서 무엇을 되찾고 싶은가?”
내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내 집중력일 수도 있습니다.
내 자신감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앞으로 만들 미래일 수도 있습니다.
용서를 이렇게 바라보면 상대가 변해야만 내가 앞으로 갈 수 있는 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사과하지 않아도 내 삶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후회하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내 상처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내 삶을 더 크게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한 일은 내가 바꿀 수 없다.
그 일이 내게 남긴 흔적도 단숨에 지울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이후의 내 삶을 어디에 사용할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그래서 진짜 용서는 상대에게 마음을 넓혀주는 일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내 삶에서 그 사람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를 다시 나 자신으로 채워가는 것.
원망에 묶여 있던 시선을 현재로 돌리고, 현재의 에너지를 내가 원하는 미래에 사용하는 것.
그때 용서는 과거를 아름답게 포장하는 일이 아니라 미래를 다시 선택하는 일이 됩니다.
용서가 억지로 베푸는 선행이 아니라 결국 내 삶의 에너지를 되찾는 일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뒤,
저 역시 스스로 신기할 정도의 변화를 체감하고 있습니다.
수년 전, 제게 가장 큰 상처로 남은 일이 있었습니다.
한때 미래를 약속했던 사람에게 매정한 배신을 경험했고,
그 사람을 위해 대책도 없이 해외에서 돌아온 뒤 제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실직의 상태였습니다.
그때는 과거를 붙잡고 원망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 보였습니다.
그런데 과거를 억지로 잊으려 할 때보다 그 에너지를 지금의 삶에 쓰기 시작했을 때, 제 삶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 사람에게 빼앗겼다고 느꼈던 삶의 방향을 다시 내 손에 가져오는 데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질문은 바뀝니다.
“언제쯤 그 사람을 잊을 수 있을까?”
이제는 이렇게 묻게 됩니다.
“내가 되찾은 이 에너지로 어떤 삶을 만들 것인가?”
그 질문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과거에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앞으로 만들어갈 삶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