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하는가: 내 언어가 현실세계에 투영하는 형태
지난 글에서는 우리가 매일 반복하는 말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운이 없다.”
“사람들은 결국 나를 실망시킨다.”
이런 말들이 단순한 생각처럼 보이지만, 반복되면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바라보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면 이런 질문이 남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을까?
저에게 이 질문은 단순한 자기계발 문장이 아니었습니다.
과거의 저를 돌아보게 만들었고, 제가 왜 그렇게 오랫동안 원망과 결핍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웠는지를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말보다 더 깊은 곳에는 자아에 대한 정의가 있다
우리는 자신을 설명할 때 여러 가지 문장을 사용합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야.”
“나는 사람을 잘 믿지 못해.”
“나는 사업에는 소질이 없어.”
“나는 관계에서 늘 상처받는 쪽이야.”
“나는 돈과는 인연이 없는 것 같아.”
이런 말들은 단순한 자기소개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그 문장 안에는 내가 나 자신을 어떤 사람으로 규정하고 있는지가 들어 있습니다.
한 번 그렇게 정의한 자신을 계속 바라보면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도 그것을 자기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밀어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나는 배우는 사람이다”, “나는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나는 내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자신을 바라보기 시작하면 같은 상황에서도 질문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차이가 꽤 중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삶을 바꾸려고 애쓰기 전에,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지를 먼저 볼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네빌 고다드가 제게 남긴 질문
이 지점에서 제가 큰 영향을 받은 인물이 네빌 고다드입니다.
네빌 고다드의 가르침에서 제가 특히 관심 있게 바라본 것은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보다 자신을 어떤 존재로 정의하는가라는 개념이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누구라고 믿는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정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생각과 말, 기억, 감정, 선택이 조금씩 그것을 만들어갑니다.
그래서 저는 자기확언을 단순히 “좋은 말을 외우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됐습니다.
내가 원하는 삶과 어울리는 사람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는 연습에 더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문장 하나를 반복한다고 현실이 자동으로 바뀐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문장이 나의 행동을 대신해주는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나 자신에게 어떤 말을 반복하는지는 내가 무엇을 시도하고, 무엇을 포기하며, 어떤 선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지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결국 자기확언의 핵심은 말 자체보다 그 말을 통해 내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려 하는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몇 달 동안 같은 문장을 반복했다
여기에는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루마니아어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앞으로 만들어가고 싶은 지식 콘텐츠를 동유럽으로 확장해보고 싶다는 목표를 생각하면서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비즈니스 환경과 문화를 알아보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루마니아어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포르투갈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처럼 널리 알려진 로망스어와 같은 계통에 있으면서도 독특한 매력을 가진 언어라는 점도 흥미로웠습니다.
그렇게 언어와 문화를 조금씩 공부하다가 어느 순간 한 문장을 자기확언처럼 반복하기 시작했습니다.
“Iertarea și recunoștința sunt doar pentru mine.”
제가 이해한 의미는 “용서와 감사는 결국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루마니아어 문법을 익히기 위한 문장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매일 자고 일어난 뒤 이 문장을 반복하고, 몇 달 동안 계속 입으로 말하다 보니 조금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문장을 외우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장이 말하는 의미를 제 삶에서 계속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용서는 상대에게 베푸는 선행이 아닐 수도 있었습니다.
감사 역시 억지로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 위한 행동일 필요가 없었습니다.
결국 내가 계속 가지고 있던 원망의 에너지를 내 삶으로 돌려놓는 일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과거를 바라보는 방식도 조금씩 달라졌습니다.
한때 미래를 약속했던 사람에게서 받은 배신도 다시 보게 됐다
수년 전, 제게 가장 큰 상처로 남은 일이 있었습니다.
한때 미래를 약속했던 사람에게 배신을 경험했고, 그 사람을 위해 대책도 없이 해외에서 돌아온 뒤 제게 남은 것은 실직이라는 현실이었습니다.
그 사건은 오랫동안 원망으로 남았습니다.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상대는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계속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질문이 달라졌습니다.
그 일이 잘못되었다는 사실과, 내가 그 일에 계속 에너지를 써야 한다는 것은 같은 이야기일까?
더 놀라웠던 것은 그 선택 역시 결국 제 삶에서 제가 내린 선택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다시 제 삶의 주인이 된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 경험에 남은 에너지를 어디에 사용할지는 제가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원망에 쓰이던 에너지를 조금씩 회수해, 제가 만들어갈 삶의 풍요와 성장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용서의 의미도 달라졌습니다.
용서는 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삶의 방향과 에너지를 다시 가져오는 일인 것입니다.
피해자의 이야기에서 창조자의 이야기로
이 변화는 T. 하브 에커가 말한 피해자의 정체성에 대한 관점과도 연결됐습니다.
과거의 저는 세상이 나에게 무엇을 해주지 않았는지를 바라보는 데 상당한 에너지를 쓰고 있었습니다.
누가 나를 배신했는지, 누가 나를 인정하지 않았는지, 왜 나는 이렇게 힘든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삶의 에너지를 그 질문에 계속 사용하면서 정작 중요한 질문을 놓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무엇을 만들 것인가?”
이 질문은 저를 피해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끌어냈습니다.
누군가에게 받은 것을 계산하는 대신 내가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가진 경험도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과거의 실패와 관계의 상처가 단순히 버려야 할 기억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안에서 얻은 통찰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하나의 가치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콘텐츠 역시 그런 과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과거의 저를 미화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당시의 생각과 행동을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다른 사람이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재료를 찾는 것입니다.
내게 고통이었던 경험이 다른 사람에게는 생각의 재료가 될 수 있다는 것.
저는 이것이 과거를 삶의 자산으로 바꾸는 한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어를 바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 말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저는 자기확언을 단순히 예쁜 문장을 반복하는 행위로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자유롭다.”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다.”
“나는 풍요롭다.”
이런 말을 반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문장이 가리키는 삶의 방향을 실제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자유를 말하면서 계속 과거의 원망에 묶여 있다면 그 문장은 아직 삶과 연결되지 않은 말일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가치를 말하면서 아무것도 세상에 내놓지 않는다면 그 가치 역시 현실과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계속 배우고 만들려고 합니다.
글을 쓰고, 언어를 공부하고, 새로운 문화를 알아가고, 제가 가진 경험과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있는 형태로 만들어봅니다.
그 과정 자체가 제가 반복하는 문장을 실제 삶으로 가져오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내가 되찾은 것은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의 방향이었다
예전에는 용서하면 과거가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합니다.
과거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받은 상처도, 내가 했던 실수도, 그때의 후회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들이 앞으로의 삶을 결정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경험한 변화도 그 지점에서 시작됐습니다.
원망을 없애려고 애쓰기보다 그 원망에 쓰이던 에너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누가 나에게 무엇을 했는지를 계속 생각하기보다 내가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반복하는 문장을 조금씩 바꾸었습니다.
그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극적으로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같은 방향을 계속 바라보는 시간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 제가 예전과 다른 질문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언제쯤 그 사람을 잊을 수 있을까?”
그 질문이 어느 순간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내가 되찾은 이 에너지로 어떤 삶을 만들 것인가?”
저에게는 이 질문의 변화가 꽤 컸습니다.
용서의 목적이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내 삶을 다시 살아가기 위한 것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에게 반복하는 말은 결국 삶의 방향이 된다
돌아보면 제가 루마니아어로 몇 달 동안 반복했던 문장도 결국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용서와 감사가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
그것은 과거를 미화하자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상처받지 않은 사람인 척하자는 말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내 에너지를 어디에 사용할 것인지 선택하자는 말에 가까웠습니다.
저는 아직도 배우는 과정에 있습니다.
과거의 모든 감정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과거의 목소리가 들려올 때 그것을 그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 목소리를 바라보고, 내가 지금 어떤 말을 선택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쌓이면 내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바꾸고 싶은 것은 삶 전체가 아니라, 삶을 바라보는 나의 위치인지도 모릅니다.
피해를 입은 사람으로만 나를 정의할 것인지, 그 경험을 지나 다시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사람으로 정의할 것인지.
과거가 나를 설명하도록 둘 것인지, 내가 앞으로의 삶으로 나를 다시 설명할 것인지.
저는 후자를 선택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거창한 선언보다 오늘 내가 나 자신에게 어떤 말을 건네는지에서 시작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결국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닙니다.
그 말이 반복되고, 생각이 되고, 선택이 되고, 행동이 되면 어느 순간 삶의 방향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도 저는 제가 원하는 삶과 어울리는 문장을 하나씩 선택하려고 합니다.
내가 나에게 반복하는 말이, 내가 앞으로 살아갈 삶을 조금씩 만들어갈 테니까요.




